2006년 11월 30일 태풍 ‘두리안’이 이곳 필리핀 삐콜 지역을 10시간 넘게 강타했다. 두 달 전 태풍 ‘밀레뇨’의 피해가 채 가시기 전이었으므로 ‘두리안’의 피해는 이 지역을 아주 초토화시켰다. 곳곳에 물이 차오르고, 땅이 쓸려나갔다. 게다가 화산재까지 함께 쓸려와 마을 전체가 화산재로 묻히기도 했다. 여기저기 시체들이 널려 있었고, 썩어가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거리엔 구걸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일부 가게에 폭동이 일어나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열지도 않았다. 전기는 물론 먹을 물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필리핀 사람들은 이곳 삐콜을 ‘땅 거칠고, 사람 거친 곳’이라고 부르는데 이젠 정말 폐허가 된 듯했다. ‘BICOL HOPE’라고 쓰여진 교회 간판을 보면서 “하나님, 저는 이곳을 보면 볼수록 한숨과 눈물이 얼룩지는데, 아직도 이곳에 희망이 남아 있습니까?” 하고 한탄 어린 질문을 했었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모든 사역의 초점은 구호 활동에 맞춰졌다. 피해 지역을 리서치하고, 구호 물품을 모아서 전달하고, 또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잠 한숨도 제대로 잘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 계속됐다. 피해가 워낙 심하고 피해 지역도 넓어서 정작 우리 교회 아이들을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게다가 다리가 끊겨, 가는 길이 막힌 상황이어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때를 기다리다가 수심이 좀 낮아져서 끊겨진 다리 밑을 통해서 건넛마을로 갈 수 있겠다 싶어 서둘러 우리 교회 아이들 집 심방을 하기 시작했다. 큰 바위들도 많이 떠내려오고, 끊겨진 다리의 콘크리트가 널려져 있어 공포감을 더했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물길을 건넜다.
태풍이 지나간 후 뜨거운 뙤약볕이 계속되었다. 마땅한 교통 수단이 없어져서 멀어도 그저 걸어서 다녀야 했다. 40여 분 정도를 걸어 ‘나씨씨’에 도착했다. 눈에 익은 한 아이가 내 손을 잡고 반가움을 표시한다. ‘그래, 넌 살아 있구나.’ 안도와 기쁨도 잠시, 집터만 겨우 남은 그 아이의 집을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 준비해간 쌀과 캔을 주고 축복과 위로의 기도를 한 후 근처에 있는 다른 아이들의 집을 더 둘러보았다. 지붕이 날아가고 집이 무너져 있었다. 옷가지 하나, 신발 하나 건지지 못해 며칠째 입었는지도 모를 더러워진 옷을 입고, 쪼리 하나 없이 맨발로 물을 길어 나르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우리 교회 아이들이어서인지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더더욱 아프다.
‘바삭’이라는 곳까지 가는 길은 우리가 물을 건너고도 거의 2시간을 더 걸어야만 하는 강행군(?)이었다. 다들 집이 무너지거나 없어져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모두 죽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니 이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위로하며 돌아와야 했다.
그 다음 주, 주일 학교 예배 시간 설교가 거의 끝날 무렵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이 늦게 도착했다. ‘나씨씨’와 ‘바삭’ 지역의 아이들이다. 당분간 그곳의 아이들은 교회에 나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2시간을 걷고 물길을 건너서 온 것이다. 게다가 어린 동생들까지 업고서. 우리 모두는 이 학생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환영해주었다. 주일 학교 예배 시간은 8시 30분인데, 이들은 7시가 채 되지도 않은 이른 시간에 집에서 나와서 아이들끼리 서로 모여서 함께 왔다고 했다. 선교사님과 선생님이 직접 찾아와서 기도도 해주고 쌀과 먹을거리를 주고 갔는데 자신들도 하나님께 나와서 감사하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예배 후 왔던 길을 다시 가야 하는 아이들 손에 막대 사탕을 하나씩 꼭 쥐어주며 축복해주었다. 너무나 기뻐하면서 다시금 발걸음 가볍게 집으로 향하는 아이들을 보는데, 하나님이 살며시 속삭여주셨다. “절망 속에서 희망이 보이니?”
태풍이 지나간 후 주일학교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서 요즘은 앉을 의자가 없어 서로 겹쳐서 앉고, 늦게 온 아이들은 서서 예배를 드린다. 북적거리는 아이들로 주일 아침이 어수선하기도 하지만 행복하다. “주일 학교 아이들 때문에 교회를 증축해야 한다”고 웃으며 던지는 선생님의 농담 한마디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이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이 희망의 아이들이 있기에 이곳 삐콜이 곧 ‘희망의 땅’으로 변화되리라…. 다시 한 번 가슴 한가득 이 희망들을 품어본다.

최유미 _ 파이디온 선교회 문화원 간사 / 필리핀 어린이 사역 선교 중